
1960년 4월 19일, 서울의 봄은 피로 물들었다.
경무대 앞은 학생들의 함성과 최루탄 연기, 그리고 곧 총알 소리로 뒤덮였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이승만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돌진했다. 경찰의 방패벽은 이미 무너졌고, 공기 중에는 죽음의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바로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역사에 피의 기록을 새겼다.
“장관님, 더 이상 못 막습니다. 시위대가 경무대를 향해 밀려오고 있어요. 발포해도 되겠습니까?”
서울시 경찰국장 유충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 내무부 장관 홍진기(洪璡基)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차갑게 떨어지는 한마디.
“사태가 위급하면 발포하시오.”
그 한마디가 18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경무대 앞에서만 21명 사망, 172명 부상. 전국으로는 사망 186명, 부상 6천여 명. 그날 이후 한국 현대사는 영원히 갈라졌다.
홍진기는 왜 그 명령을 내렸을까? 그 물음은 65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 명령은 단순한 관료의 실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앙일보를 낳았고,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끌고간 ‘보도 DNA’가 되었다.
3.15 부정선거, 그리고 불타는 봄
모든 것은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시작됐다. 이승만 정권은 민주당 후보 조병옥 박사 사망 후 사실상 단독 출마 상태였지만, 그래도 표를 조작했다. 마산에서 투표함이 바다에 빠지고, 경찰이 시위 학생 김주열의 머리에 최루탄을 박아 넣었다. 그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순간, 국민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다.
“이승만 독재 타도!”
“부정선거 무효!”
학생들이 먼저 일어났다.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그리고 전국으로 번졌다. 이승만은 4월 18일 밤 최인규 내무부 장관을 해임하고 홍진기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바로 그 다음날, 4월 19일이었다. 홍진기는 취임한 지 하루 만에 시위 진압의 총책임자가 됐다.
그는 원래 법무부 장관이었다. 일제 강점기 고등고시 사법과 출신의 엘리트, 용케 살아남은 전형적인 친일·친미·친이승만 권력지향적 관료였다. 그는 “공산당이 배후에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4월 18일 밤 이승만과 긴급회의를 가진 뒤 “강경 진압” 방침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는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았다.
“발포하시오.”
그 명령은 무차별이었다. 경찰은 기관총까지 동원했다. 학생들이 “총이다! 엎드려!” 외치며 흩어질 때, 이미 수많은 젊은 가슴에 총알이 박혔다.
사형 → 무기 → 가석방… 그리고 삼성의 손길
4월 26일 이승만이 하와이로 도피했다.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혁명재판소가 열렸다. 무고한 시민 사상을 일으킨 발포명령자 홍진기는 1호 피고였다.
“피고인 홍진기는 내무부 장관으로서 경찰을 지휘해 무고한 시민에게 무차별 발포를 명령, 186명을 사망케 하고…”
1961년 11월 10일, 사형 선고.
법정은 술렁였다.
흰색 죄수복 차림의 홍진기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졌다.
하지만 홍진기의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1961년 9월 3일 1차 판결에서 혁명재판소는 홍진기와 곽영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가, 같은 해 12월 확정 판결에서 홍진기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곽영주의 사형만 확정했다. 유충렬은 징역 20년, 백남규는 징역 3년.
곽영주는 그날 서울형무소에서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발포명령자 피고 1호 홍진기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이후 특사로 가석방됐다. 그 배후에 누가 있었을까?
바로 이병철이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홍진기 선처를 호소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홍 장관은 국가에 충성한 사람입니다. 언론을 통해 속죄하게 해주십시오.”
중앙일보의 탄생, 그리고 사카린 밀수
이병철은 5.16 혁명후 부정 축재자로 몰리며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고초를 당하며 벼랑 끝에 섰다. 공들인 관가와 정부의 보호막도 장관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 무용지물이었다.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한동안 정치권 진출을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정치를 포기하고 언론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1년여를 두고 숙려한 끝에 정치가의 길은 단념했다. 정치의 목적은 국민을 잘살게 하는 데 있다. 그런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종합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정권에 관계없이 사업을 계속하려면 신문을 하나 만들어야 해.”
이병철은 정치적 방패가 필요했다. 경쟁사 였던 럭키 금성(LG)는 이미 MBC, 부산일보, 국제신문 지분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형태로 언론사업에 진출하고 있었다.
그는 신문 창간을 맡아줄 인물로 4.19 사형수 홍진기를 선택했다. 홍진기는 정치적 부담이 큰 인물로 논란이 컸지만 이병철은 부정축재자로 몰린 자신의 이미지도 희석시키고 박정희 정권에 협조적 제스처가 됐다.
그리하여 1965년 9월 22일, 중앙일보가 창간됐다.
창간호에서 “국민의 신문, 국민을 위한 신문을 그 본시(本是)로 한다”를 담았다.
창간사에서 홍진기는 이렇게 다짐했다.
“권력에서 멀리, 민심의 중앙에 서겠습니다.”
동양, 제일, 중앙 중에서 선택한 이름이 ‘중앙일보’의 사명(社名)이었다. 그는 정말로 회한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밤마다 4.19의 총성을 들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병철에게 말했다. “내가 피로 물든 손으로라도 민심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다 1966년,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밀수하다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진기의 첫 실험대는 이병철 삼성회장이 소유한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막는 일이었다. 이 회사는 이병철 회장이 국가 재건과 식량 증산에 필수적인 비료 생산을 위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당시 사카린은 설탕보다 500배 달아 수입이 철저히 통제됐다. 비료 공장 건설에 필요한 외자 및 운영 자금 마련을 위해, 건설 자재를 수입하는 것처럼 꾸며 사카린 원료 등을 몰래 들여와 제일제당에 넘기려 했다. 액수는 1966년 기준으로 3천만 달러, 지금 돈으로 3조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이병철은 구속됐고, 삼성(제일제당, 제일모직)은 풍전등화였다.
밀수 사건이 언론에 처음 보도된 후, 중앙일보는 경쟁 신문사들이 대서특필할 때, 이 사건을 다른 기사들과 함께 작게 다루거나 축소해 보도했다. 밀수가 적발된 계열사 한국비료에 대해 우호적인 논조를 유지했하며, 사건의 초점을 밀수라는 불법 행위가 아닌 기업의 불가피한 상황이나 정부의 행정 처리 문제 등으로 돌리려고 시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이병철 회장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한국비료의 삼성그룹 보유 지분 51% 전량을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은퇴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중앙일보를 통해 여론에 순화시키고 박정희 정권과 물밑 접촉 끝에 은퇴선언 한지 17개월만에 1968년 경영에 복귀했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정,관계를 직접 삼성이 중앙일보를 통해 관리해야 한다는 관행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진화했다.
그때 중앙의 길은 정해졌다. 첫째는 ‘사업보국’ 삼성을 지키는 것, 둘째는 권력에 밀착하지 않고 민심의 중앙에 서는 것이 중앙일보 창업주 이병철과 홍진기의 암묵적 약속이었다. 두 사람의 창업의지를 받들면 중앙일보는 삼성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원래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는 홍진기와 그의 후손은 넘어서는 안되는 불문율 같은 선이 그어졌다.
홍씨 가문은 ‘삼성에 좋은 것은 대한민국에도 좋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져야 했고, 삼성의 사업을 다치게 하거나 경쟁을 하는 것, 그리고 언론으로서 권력에 너무 밀착하지 않고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유지는 이병철-홍진기 회장 이후 두 세대 만에 깨졌다.
10대 시절의 홍석현은 사형수였던 아버지가 이병철의 후원으로 되살아나고 JTBC의 전신인 동양방송(TBC) 사장이 되고 중앙일보 사장이 되는 극적인 과정을 지켜봤다. 사형수나 무기수의 아들이 웬만해서는 걷기 힘든, 4·19 발포 명령자의 아들이 좀처럼 걷기 힘든 길을 그는 무난히 걸을 수 있었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이 대학에서 산업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홍석현은 1977년부터 6년간 세계은행을 거쳐 전두환 정권 때는 재무장관 비서관과 대통령비서실장 보좌관을 지낸 뒤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중앙일보 경영을 맡은 뒤 한글 제호를 쓰고, 가로쓰기, 섹션 신문을 발행한다든가, 전문기자제도를 운영한다든가 하는 신선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종이신문 몰락을 예견하지 못하고 2000년대초 기존의 대판(브로드시트)에서 베를린판형을 위해 4천억원 규모의 신형 윤전기를 도입해 중앙일보의 재정에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매년 감가상각비와 이자 비용으로 지급하다 계열사로 떠넘겨 지금도 중앙그룹와 계열사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고 있다.
홍석현은 중앙일보 회장에 취임해 언론경영에 관록이 붙자 아버지 홍진기에 의해서 그어진 ‘넘어선 안될 선’을 지우고 싶어했다. 중앙일보를 ‘삼성그룹의 호위무사’ 역할을 해야하는 자신의 업보를 떨쳐버리고 싶어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언론계를 넘어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였다.
“이번에 주미대사를 맡으시고 임기 끝나면 UN 사무총장 순번이니…”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갔다.
홍석현은 노무현 대통령의 주미대사 제안을 받고 중앙일보 회장직을 던졌다.
그 순간 삼성 이건희 회장의 분노는 대단했다. 중앙일보가 해야될 일과 하지말아야 할 일, 그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언론이 정치와 밀월 관계가 시작되고 언론이 견제의 칼날을 놓아버리는 순간 중앙일보 역시 정치와 대중의 심판대에 올라가는 일을 의미했다.
이병철 창업주와 홍진기가 설계한 중앙일보의 역할에서 ‘중앙선’을 이탈하는 사건이 되었다. 중앙일보는 삼성을 지킬 ‘칼’이 무뎌지게 된다면 삼성 역시 무방비 상태가 노출될 수 밖에 없기에 이건희 회장의 분노와 당혹감은 컸다.
우려했던 일은 너무도 급박하게 터졌다. 홍석현 회장이 2005년, 2월 주미대사 임명장을 받아든 5개월째인, 7월에 ‘삼성 X파일’이 터졌다.
안기부의 도청 녹취록인 이 X파일에는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불법 대선 자금 제공, 고위 검사들에 대한 금품로비 등을 논의하는 대화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내용은 살인적이었다. 검찰 로비, 언론사 사주 매수, 유력 정치인 금품…모든 오물이 담겨있었다.
X파일 대화록에는 삼성과 중앙일보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데 대해 당시 여야 유력 대선후보인 이회창과 김대중이 직접적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거나 최고위급 검찰청 간부들에게 명절 때마다 떡값 명목으로 500만~1,000만원의 금품을 제공하면서 검찰 인맥 관리를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97년 9월 9일 X파일 녹취록엔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이학수 당시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에게 “(이회창 후보의 동생인) 이회성이가 왔는데, 내가 돈을 줬는데, 차를 우리 집이 아니라 길에 세웠어. 이번에 준 30억 원도 다 썼대요.”라고 언론사 사주의 발언이라기엔 너무나 낯뜨거운 내용들이 담겼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완료됐다는 이유와 증거자료 자체가 불법 도청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는 법리로 증거능력 자체가 부인됐다. 홍석현 전 대사는 외환관리법 위반 및 증여세 포탈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으나, 대법원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집행유예)을 받았고, 핵심인 로비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만료 등의 이유로 제대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이 사건을 목숨걸고 보도했던 이상호 기자는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으며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고 2013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삼성과 중앙일보의 비리를 까발린 대가였고, ‘초기업-언론 권력’에 매수돼 있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는 지표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그 사건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석현 회장과 삼성을 보호하려 애썼다. 공항에서 귀국하는 홍석현 회장을 중앙일보 기자들이 철벽을 치며 타 언론사 기자들의 취재를 방해했고, 검찰과 법원에 출석하는 그를 향해 수십여명의 중앙일보 기자들이 “회장님 힘내세요”라고 응원 구호는 전 국민들의 비웃음을 샀다. 중앙일보의 불신과 삼성 공화국이라는 오명이 생긴 것도 이때가 가장 큰 충격파로 작동했다.
이는 홍석현이 자초한 일이었다. 앞서 말한 4.19 사형수 홍진기가 살아남아 세운 중앙의 창립 정신을 어긴 일이었다. 이처럼 홍석현의 정치적 외유는 감춰어져 있던 ‘중앙의 본질적 업무가 무엇인지’를 오히려 외부에 알리는 단초가 되었다.
‘삼성 X파일’의 후폭풍과 여진은 컸다. 국민의 신뢰 추락. 그리고 홍석현을 주미대사로 지명했던노무현 대통령에게도 큰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노무현을 향한 광기 어린 공격이 시작됐고 중앙일보도 이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중앙일보는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다.
재벌 3세의 역할은 수성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은 온실속에서 경영권을 세습받은 3세는 부족한 경영 경험과 판단으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 보다 창업주 이병철-홍진기의 창업 정신에 맞게 회사로 유지, 경영하는 일이었다.
특히 할아버지 홍진기의 유지를 아버지 홍석현이 훼손했다면 바로 잡는 것은 손자 홍정도의 몫이었다.
스탠포드 MBA를 졸업하자마자 중앙일보 본사로 복귀한 홍정도는 아버지 홍석현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치적 인연을 끊어내고 보수 이명박정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 1편에서 소개했듯 스탠포드 동문인 노무현 전 대통령 아들 노건호의 팰로 알토, 샌디에이고 보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2009년, 서거직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사람들이 나를 가장 괴롭혔다”고 주변에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중앙일보 1면 톱으로 “노무현 일가와 측근 비리”를 쏟아내던 그 시절, 데스크들은 “정당한 취재”라고 강변했다가 궁지에 몰리면 “윗선 지시”라고만 했다. 그 윗선에는 삼성의 원심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야심을 꿈꾸고 있는 홍정도가 있었다.
2011년 홍석현이 JTBC를 세우고 홍정도에게 부사장으로 경영을 맡겼다. TBC (Dongyang Broadcasting Company)는 이병철 회장이 중앙일보 창간(1965년)과 함께 설립했던 방송사였으나,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인해 KBS에 강제 통합되며 폐국되었다. TBC 앞에 TBC의 ‘J’는 중앙일보(JoongAng Ilbo)를 붙인 것은 상징적이다. 중앙그룹이 삼성의 종속적 지위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시도한 아버지 홍석현의 의중에 제동을 조타수 역할을 자임했다.
홍정도가 직접 전면에 나서기엔 부담이 컸고 MBC 앵커 손석희에게 JTBC 보도국 전권을 맡기다는 미명아래 보도 부문 사장으로 영입했다. JTBC는 삼성 및 이재용 비판 보도들을 이어갔다. 중앙일보에선 일어나긴 힘든 ‘역성혁명의 시발’이었다.
홍석현이 기존의 중앙일보를 내세우지 못한 것은 ‘삼성 X파일사건’처럼 삼성을 비호해온 전력 때문이기도 하고, 삼성그룹의 견제, 중앙일보 내부의 친(親) 삼성 세력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2016년에 쓴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라는 저서에서 홍석현 회장은 중앙일보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고자 JTBC를 만들게 됐음을 설명했다. 중앙일보로는 새로운 삼성관을 표출하기 힘들어서 JTBC에 손석희의 영입을 홍정도의 경영 성과로 공공연하게 간주하고 있다.
신생 방송사로 개국한 JTBC는 강력한 특종이 필요했고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을 단독 보도하며 사건을 공론화하고, 이는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결과로 이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JTBC가 공개한 증거 자료는 검찰과 특별검사팀이 최순실 및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는 직접적인 단서가 되었고,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발의하고 가결하는 과정에서, JTBC가 확보하고 보도한 비밀 문건 유출 및 국정 개입 사실은 핵심적인 헌법 위반 근거로 채택되었다.
이 불똥은 삼성에게로 튀였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게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과정(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에 대한 정부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뇌물을 공여하고, 그 과정에서 회사 자금을 유용한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된 것이었다. 박근혜 탄핵재판보다 더 빨리 진행되었다.
2017년 8월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고, 2018년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거쳐 2021년 1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재구속되었다.
이재용은 560여 일(약 1년 7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되는 피해를 입으면서 ‘오너 리스크’가 현실화 되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구속되자, 삼성그룹과 계열사는 모기업 총수를 수감에 이르게한 JTBC의 광고를 줄이면서 관계 차단에 나섰다.
JTBC는 종편 출범 초기부터 공격적인 콘텐츠 투자와 높은 초기 운영 비용으로 인해 지속적인누적 적자상태에서 삼성그룹의 대대적인 광고물량 축소는 적자를 심화시켰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와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드라마, 예능 등 킬러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대규모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상장이 절실했지만 지속적인 영업 손실과 투자 부담으로 인해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재무 상태와 복잡한 경영 구조로 인해 어렵게 되었다. 이에 JTBC는 상장 사전작업으로 JTBC스튜디오(현 SLL)로 분사하고, 이 스튜디오 법인의 상장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는등 콘텐츠 부문을 중심으로 자본을 유치하려는 전략을 짰지만 이 과정에서 JTBC 보도부문을 축소시키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불러일으키는 등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삼성을 지키고 민심의 중앙에 서라”는 홍진기의 유지를 어긴 결과가 현재 수년째 흔들리고 있는 중앙그룹 위기의 핵심 원인이기도 하다.
4·19에서 오늘까지, 무엇이 남았나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도 성숙한 국민은 침착했고, 군과 경찰도 경거망동을 하지 않았다. 권력에 맹종 충성하는 장관의 발포명령도 없었고, 계엄군을 막아선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도 없었다. 민주당과 국회는 신속히 대응했다. 이로인해 ‘국민주권’을 기치로 한 이재명정부가 들어섰다.
1960년 봄, 경무대 앞에서 쓰러진 학생들의 이름은 교과서 뒤편에 작게 실려 있을 뿐이다. 반면, 그들을 향해 총을 쏜 국가의 시스템은 이름과 얼굴을 바꾸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 4·19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려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홍진기 내무부 장관은, 수감 생활 이후 “민심의 중앙에 서겠다”는 언론인으로 복귀했다.
- 그가 세운 중앙일보는 이후 수십 년간 정권과 재벌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무대가 되었다.
일제 부역과 200여명 사망자와 수천명 부상자를 낸 시위대 발포 명령자였던 학살자는 살아남았다. 그 후손에는 부와 명예, 언론 권력이 주어졌다.
이 계보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중앙일보라는 이름은, 정말 ‘민심의 중앙’을 뜻하는가, 아니면 ‘권력의 중앙’에 서겠다는 선언이었는가.”
피는 이어진다.
할아버지 홍진기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시위대 학생들을 쐈고, 아버지 홍석현은 삼성 호위무사를 넘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언론 사명을 저버렸고, 손자는 아버지의 실수를 덮고 권력에 밀착하기 위해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했던 대통령과 그 일가를 향해 쐈다.
홍진기 회장이 만약 살아 있다면, 손주 홍정도에게 뭐라 했을까?
“너는 왜 또 피를 흘리게 했느냐…”
중앙일보의 뿌리는 피로 물들었다. 그 피는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이제 그 피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또 다른 그림자를 그렸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미주(미국)에서 촉발된, 잊히지 않는 그 피의 그림자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계속)
최상태 기자
전 미주 중앙일보 기자
steven@koreatvradio.com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개혁의딸과 함께 [노무현 서거 비하인드 히스토리 시리즈]와 관련, 유튜브로 제작해 나갈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