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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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이렇게 빨리 떨어지나"…미국 디플레 시작됐다

가전·PC 등 5개월 연속 내려
통화긴축·공급망 개선 영향

 

지난해 인플레이션의 '주범'으로 꼽힌 미국의 중고자동차 가격이 최근 들어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혼다자동차 대리점에 중고차들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가파른 인플레이션을 겪어온 미국에서 드디어 내구재를 중심으로 가격이 내려가는 디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연방 중앙은행(Fed)의 통화 긴축 정책과 공급망 문제 해소가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3일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Fed가 선호하는 물가지표인 개인소비지출(PCE) 지수는 지난 10월 전년 동월 대비 3.0%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 지수는 6월 7.1%로 연중 고점을 찍은 뒤 줄곧 상승폭이 둔화하고 있다. PCE 지수를 구성하는 하위 지수 중 하나인 내구재 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2.2% 하락했다. 내구재 지수는 작년 2월 10%대 급등세를 보였는데 올해 6월부터 하락세로 전환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고차와 가전제품, PC 등 비교적 가격이 비싸 한 번 구입하면 1년 이상 쓰는 내구재가 전체 물가 상승세 둔화를 이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선 미국이 일부 제품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의 디플레이션 시대로 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경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 위험이 높았다. 미국의 내구재 가격은 세계화로 인한 노동비용 감소와 생산성 향상으로 1995년부터 2020년까지 연평균 1.9% 하락했다.

월가에선 Fed의 통화 긴축 정책이 실물 경제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공급망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것도 내구재 물가 하락에 기여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는 수요 약화로 인한 공급망 개선이 2022년 이후 인플레이션 하락의 약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더그 맥밀런 월마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앞으로 몇 달 내에 미국은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며 “고객들은 상품 가격이 더 낮아지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물가하락 예상보다 빨라…"내년 2% 목표 조기 달성"
UBS "내년 경기침체 가능성"…팬데믹발 공급망 문제 해소 영향

 

뉴욕 월가에서 미국의 디플레이션에 대한 전망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월마트와 같은 소매업체를 중심으로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는 데다 소비자물가지수(CPI)와 개인소비지출(PCE) 지수 등 대표 물가 지표도 둔화 추세를 보여서다. 자동차와 부품, 가전, PC 등 내구재를 중심으로 가격이 빠르게 내려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4%를 웃도는 높은 임금 상승률은 변수가 될 수 있다. 고임금에 따른 소비 진작이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내년 9월 물가 1.8%로 떨어질 것”

 

모건스탠리는 최근 발간한 분석 보고서에서 공급망 개선과 수요 약화로 인해 내년 중반까지 디플레이션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내년 9월에는 전체 PCE지수의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이 1.8%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2026년이 돼야 목표치인 2%로 회복할 것으로 내다본 미국 중앙은행(Fed)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이 같은 전망이 나오는 것은 내구재의 가격 하락 때문이다. 10월 신차와 중고 자동차 및 부품 가격은 9월에 비해 0.4% 떨어지며 5개월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가정용 가구는 0.2% 내려갔고, 컴퓨터 장비와 같은 오락 용품은 0.4% 떨어졌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의 앨런 데트마이스터 경제학자는 “자동차가 내년 상당 기간 인플레이션을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UBS는 또한 내년 4분기에 인플레이션이 1.7%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며 경기 침체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소매업체들도 디플레이션을 언급하고 있다. 디플레이션 현상은 실물 경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 건축자재 유통업체인 홈디포의 상품화 담당 부사장인 윌리엄 바스텍은 지난달 콘퍼런스콜에서 “목재와 구리 가격 하락으로 소비자의 평균 구매 증가율이 억제되고 있다”고 말했다. 원자재 가격이 내려가면서 상품 가격도 하락해 소비자의 구매액이 예전 속도로 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존 퍼너 월마트 미국지사 최고경영자(CEO) 또한 “가격 인하 품목이 작년에 비해 50% 증가했다”고 밝혔다.

 

○고금리 효과 시작

내구재를 중심으로 한 디플레이션이 본격화하자 Fed의 통화 긴축 정책이 실물 경기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고금리에 따라 자동차대출, 주택담보대출, 신용카드 이자 등이 영향을 받으면서 미국인의 소비 여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신용정보회사 이퀴팩스에 따르면 금융위기 당시 서브프라임 대출의 60일 이상 연체 발생률이 5%였는데 현재는 7%에 육박하고 있다. 마이크 브리슨 무디스애널리틱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연체율 상승에 대해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증가 속도가 정상(속도)보다 너무 빠르다”고 말했다.

메이시스·노드스트롬백화점 등 주요 소매업체도 최근 올해 2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개인들의 신용카드 연체율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에이드리언 미첼 메이시스백화점 최고운영·재무책임자는 “2분기 연체율이 증가할 것으로 보긴 했지만 증가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고 했다.

공급망 문제 완화도 디플레이션에 기여했다. 뉴욕연방은행이 발표하는 글로벌공급망압력지수(GSCPI)는 10월에 -1.74까지 떨어지며 1997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 또한 9월 “상품 가격 하락은 △수요 약화 △(공급망에서) 원활한 배송 △금리 상승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임금 상승이 변수

여전히 뜨거운 고용시장과 이에 따른 임금 상승이 물가를 좌우하는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비농업 부문 임금 상승률은 10월 4.1%로 2021년 10월 이후 가장 낮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인 2~3%보다는 여전히 높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 이윤이 인플레이션에 미친 영향은 지난 1분기 2.85%포인트에서 2분기 1.71%포인트로 감소했다. 임금을 뜻하는 노동비용의 영향은 3.52%포인트에서 3.57%포인트로 증가했다.